선시(禪詩), 깨달음을 노래한 명상의 시편들
마쓰오 바쇼의 옛 연못이라는 선시 한 편 읽어보자.
옛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선시란 어떤 것인가, 느낌이 오는가?
이번에는 조금 더 익숙한 형태를 갖춘 다른 선시 한 편을 읽어보자. 개인적으로 이 책에 실린 선시 중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던, 왕유의 목련이라는 선시이다.
나무 끝에 연꽃
산속에 붉게 피었네
개울 옆 인적 없는 집가에
저 홀로 피었다 지네, 피었다 지네.
앞머리에서는 선시란 무엇이고 중국, 일본, 한국의 선시에 대한 특징들은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선시란 선과 시가 합쳐진 말이다. 선이라는 것은 명상이라는 드야나(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중국인들은 이를 사유수(思惟修)라고 번역하였다. 사유수란 생각을 어느 한곳에 집중하는 정신통일법을 말한다.
이것이 중국적인 변형에 의해 ‘선’이라는 것이 되었고 선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선이라는 것과 같다고 한다.
궁극적인 선에 이르면 아무것도 필요없다. 말도 필요없고 글은 더더욱 필요없으며 표현할 필요도 없다. 그럴 수도 없다. 궁극의 깨달음, 그 자체를 선의 한 부분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이 때문에 선은 누군가에게 전달하기가 무척 곤란할 수 밖에 없다. 깨달음 그 자체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가장 큰 문제는 대체 무엇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이다.
언어가 사고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선이라는게 말이나 단어의 형태를 갖추는 그 순간, 순수한 깨달음은 그대로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제대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선이라는 것을 제 삼자에게 알리기 위해 미치광이처럼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도 그래서도 안되니까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런 짓으로는 깨달음의 섬세함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비언어적이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시라는 형태를 택한 것을 선시로 볼 수 있다는게 이 책의 설명이다.
티끌 같은 일에 골몰하여 만사를 그르쳤네
되돌아보매 삼십이 년은 잘못된 것뿐,
서쪽 정원의 비바람은 밤이 되어급한데
도리는 말이 없고 봄 저 홀로 가고 있네.
(봄을 보내며, 허백 명조)